1월 22일, 한국과 바레인의 16강 경기가 진행 되었습니다.




필자는 바레인을 상대로 쉽게 승리할 거라 예상했고, 많은 분들 역시 그리 생각했을 것 입니다.



결과론적으로는 이기기는 했으나, 경기 기록이 보여주듯이 연장전까지 갔던 힘든 경기였습니다.






전반전



전반전은 한국이 처음부터 끝까지 높은 볼 점유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바레인의 골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흡사 필리핀 전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전반 43분, 경기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에 황희찬 선수가 선제골을 만들어냅니다.




비록 많은 골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나, 선제골이었기에 후반전에 추가골을 만들어내리라 확신했죠.







후반전




후반전은 여러모로 위태로운 경기였습니다.




후반전 초반에는 그래도 한국이 높은 볼 점유율을 보여주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주도권이 바레인 쪽으로 넘어가버립니다.




그리고 바레인의 볼 점유율이 슬슬 높아지면서 계속 공세를 취하던 한국이 수세로 전환하기 시작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던 중, 황희찬 선수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장면이 잡힙니다.



곧 심판이 휘슬을 불었고, 한국 선수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바레인 선수는 경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합니다.




모하메드 알 로마이히는 열려버린 골대 앞에서 슈팅을 때렸습니다.



첫 슈팅은 막았지만, 수비수가 넘어지면서 간신히 흘린 것이었기에 모하메드 알 로마이히 선수는 다시 한번 더 슈팅



후반 77분에 바레인의 동점골이 만들어집니다.






조별 리그와는 달리 한번 지면 바로 탈락하게 되는 토너먼트였기 때문에 보는 이들은 가슴을 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골이 먹힌 이후, 한국은 다시 볼을 점유해나가기 시작했지만, 불안한 모습을 여럿 보이면서 연장전으로 이어집니다.







연장전




연장전은 문자 그대로 총력전이었습니다.



양측 모두 강력하게 공격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바레인은 밀리는 분위기였고, 마침내 김진수 선수가 헤딩골을 넣음으로써 2:1 스코어가 만들어집니다.






한국 선수들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바레인은 묶여버린 탓에 이렇다할 공격을 못하고 경기가 종료됩니다.







비록 2:1로 승리함으로써 8강 진출권을 얻게 되었으나,




이대로 4강, 그리고 결승까지 노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경기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따기를 바라며



8강에서 있을 카타르 전에서는 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를 희망하며


응원합니다.


(출처: 네이버 스포츠)



어제인 1월 16일 오후 10시 30분에 C조의 1,2위를 결정하는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은 16강 진출이 확정된 상황이었으나, C조 1위로 16강에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손흥민 선수도 투입합니다.






전반




극초반에는 서로의 공수가 빠르게 전환되며 꽤나 빠른 경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손흥민 선수가 중국의 패널티 박스 내에서 중국 수비에 걸려 넘어졌고, 그대로 패널티킥 선언이 됩니다.



킥은 중국 선수에 의해 목에 상처를 입은 황의조 선수가 맡았고, 보기 좋게 선제골을 넣습니다.







후반



후반전에서는 한국이 보다 공격적으로 나가고, 중국이 움츠러들면서 모두가 추가 골을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코너킥 찬스를 얻는 데에 성공합니다.



킥커는 손흥민 선수였습니다.



손흥민 선수의 슈팅은 정말 깔끔하고 정확했습니다.



공중으로 뜬 볼은 그대로 김민재 선수에게로 전해졌고, 김민재 선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해딩골을 터트립니다.



지난 키르기스스탄 전에 이은 두번째 해딩골이었습니다.






이후 경기는 순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중국 선수들이 보다 과격해지면서 중국 선수들에게 여러차례 옐로우 카드가 선언되기도 했었습니다.




경기는 2:0으로 마무리 되었고, 자신감 넘치던 중국은 C조 2위라는 성적으로 16강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경기에서 중국을 격파함으로써 중국의 자존심을 꺾어버렸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지만



무엇보다 선수들이 이전 필리핀 전, 키르기스스탄 전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발전된 플레이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대한민국의 16강 상대는 누구일까?




우리의 16강 상대는 A/B/F조 중 한 조의 3위입니다.



아직 다른 조의 경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정해진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상을 해보자면




바레인 / 오만 / 투르크메니스탄 정도 입니다.



*이 글은 영문 위키를 요약한 번역글 입니다.



목차

1. 지난 이야기 요약

2. 외교전

3. 서우크라이나의 운명

4. 램코 공화국


1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8

2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9

3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10



1. 지난 이야기 요약


  (1) 1919년 6월 18일, 계속 밀려나던 서우크라이나 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고(초르트키프 공세) 6월 27일까지 120km를 진격합니다.


  (2) 하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의 폴란드 군은 곧장 반격에 나섰고, 수많은 서우크라이나 군과 피난민이 동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도망갑니다.




2. 외교전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이 양측의 군대가 치열하게 맞붙는 동안 양국의 외교전 역시 치열하게 진행 되었습니다. 서우크라이나의 경우에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3국 협상국이 민족자결주의가 기반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자신들을 돕기를 희망했습니다. 더 나아가 서방국가들이 폴란드에게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영토에서 군을 철수하도록 강요하기를 바랬습니다.


  3국 협상들은 이를 가지고 여러 의견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수상으로 있던 영국과 별 힘이 없던 이탈리아가 폴란드의 팽창을 반대했습니다. 양국은 폴란드의 행위는 민족 자결주의를 위반하는 행위라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속내는 달랐습니다. 예로부터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꺼려했고, 이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여전했습니다. 향후 러시아가 동갈리시아 지방을 흡수하면, 골치아파질 거라고 생각했던 영국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번 언급되었던 서우크라이나의 드로호비치 유전 지대 역시 영국이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서우크라이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한참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되던 1919년 1월에 폴란드와 체코 사이에서 1주일 동안 무력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전부터 서우크라이나와 무기와 기름을 교환하던 사이이기도 했었죠.


  한편, 프랑스는 폴란드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프랑스는 폴란드를 크고 강하게 키워서 독일과 함께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프랑스는 폴란드가 영유권을 주장하던 독일령, 리투아니아령, 우크라이나령을 폴란드령으로 편입하는 안을 지지했습니다. 더 나아가 폴란드가 할러 장군이 이끄는 푸른 군대를 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으니 말 다했죠. 


  1918년~1919년 겨울 동안 폴란드 정부는 협상국들이 폴란드의 이익을 완전히 지지해주고, 새 폴란드 정부에 대한 협상국의 지지를 약화시키려던 독일의 허위정보 공작을 막기 위해 외교 공세를 펼쳤습니다. 폴란드 정부는 독일과 우크라이나가 서로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이에 서우크라이나는 그 사실을 적극 부인하며, 폴란드가 서우크라이나의 이미지를 친독 국가 겸 볼셰비키로 만들려고 한다고 주장합니다.


  1919년 1월에 프랑스는 양측이 휴전 협정을 맺어 전쟁을 끝내려고 시도해보았습니다. 그리고 2월에 프랑스는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권유합니다. 리비우와 드로호비치 유전 지대를 포함한 동갈리치아의 70%를 폴란드에게 넘기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당연히 거절합니다.


  1919년 3월 중순, 폴란드를 붉은 군대에 대한 공격 거점으로 삼고 싶어하던 포슈 장군은 폴-우 전쟁을 최고 전쟁 위원회로 가져옵니다. (최고 전쟁 위원회: 1차 세계대전 동안 협상국의 군사 전략을 논하던 곳. 1917년 베르사유에서 설립됨.) 그리고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대한 대규모 군사 지원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리비우에 포위되어 있는 폴란드 군을 위해 할러 장군의 푸른 군대를 즉시 보내자고 합니다.


  1919년 5월, 남아공의 루이스 보타가 이끄는 협상국 위원회에서는 드로호비치 유전 지대를 우크라이나가 소유하고, 리비우를 폴란드가 소유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제안합니다. 우크라이나는 이 제안에 동의 합니다만, 동부 전선에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폴란드는 거절합니다. 게다가 엎친격 덮친격으로 볼셰비키 군대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군대를 격파하여 포돌리아와 볼히니아 지방으로 진격하자, 폴란드는 러시아에 맞서 동갈리치아 전체를 군대로 통제하고, 루마니아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잠깐 1919년의 우크라이나 상황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당시 우크라이나 내부는 공화국군, 볼셰비키군, 러시아 백군, 그리고 아나키스트이자 Free Territory의 지도자, 검은 군대 지휘관인 네스트로 마크노에 의해 극심한 혼돈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여기에 폴란드와의 전쟁 문제로 삼국 협상국까지 개입해버리니 문자 그대로 개판 오분전 상황이었습니다.



(빨간색: Free Territory 영토, 연한 빨간색: 마크노비스트들이 점령한 지역)


  아무튼 이러한 제안들이 오가는 가운데에 6월 말, 폴란드 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며 우크라이나 군을 신나게 밀기 시작합니다. 협상국은 급하게 폴란드에게 공격 중단을 부탁하지만, 폴란드는 무시하고 공세를 계속합니다. 하는 수 없이 협상국 위원회는 할러의 군대를 포함한 폴란드 군에게 동갈리치아의 즈브루치 강까지 진격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때 즈음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열 되면서 얻은 7개의 석유 정제 공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석유 정제 공장은 우크라이나의 유전 지대에서 오는 기름 덕분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체코는 '폴란드에게 그 기름은 우리가 돈 주고 샀으니 돌려주세요.' 라고 요구하지만, 폴란드는 이것도 무시합니다. 비록 체코는 여기에 대해 보복하지는 않았지만, 폴란드 보고서에 따르면 체코는 해당 유전 지대를 폴란드로부터 빼앗고 우크라이나에게 돌려주려고 했다고 합니다.



  1919년 11월, 파리 강화 회의의 최고 위원회는 동갈리치아를 25년 동안 폴란드에게 양도하고, 이후에는 주민 투표를 통해 땅의 주인을 결정하라고 합니다.



3. 서우크라이나의 운명


  조약 체결 이후,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정치적 망명자들을 지원해주는 비엔나로 추방됩니다. 그리고 UHA 소속 병사들은 보헤미아 지방에 억류됩니다. 이후 서우크라이나 정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프랑스 정부와 영국 정부와 함께 베르사유 정착지에서 열심히 외교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국제 연맹은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1921년 2월에 갈리치아를 폴란드 영토에서 제외될 것이며, 폴란드는 해당 지역을 점령한 국가에 불과함을 공표합니다. 반면, 파리에 있는 대사위원회는 1921년 7월 8일, 예브헨 페트루셰비치의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에 속한 그 어떠한 지역도 대표할 권리가 없다고 합니다.


  양측의 긴 협상 끝에 1923년 4월 13일, 대사 위원회는 갈리치아가 폴란드 땅에 완전히 편입될 것을 결정합니다. 1923년 이후, 마침내 갈리치아는 국제적으로 폴란드 영토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해산합니다.



4. 램코 공화국



 


(램코 공화국 국기)




(램코 공화국 영토)



  램코 공화국 혹은 램코-루스 공화국이라 불리는 이 작은 나라는 플로린카 지역을 중심으로 1918년 12월 5일에 탄생했습니다. 친러파가 이끌었기에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대신 러시아와 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편에서 소개했던 코만차 공화국/동 램코 공화국과는 반대의 성향이죠. 하지만 러시아와 연합하는게 어려워지자 체코슬로바키아령인 카르파티안-루테니아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카르피타인-루테니아를 관리하던 조지 자트코비치의 반대로 실패하게 됩니다.


  램코 공화국의 대통령은 야로슬라프였습니다. 그는 1920년 3월, 폴란드 정부가 램코 공화국을 흡수할 때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끝-



​자료 출처

폴-우 전쟁 영문 위키

램코 공화국 영문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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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문 위키를 요약한 번역글 입니다.




목차

1. 지난 이야기 요약

2. 서우크라이나의 초르트키프 공세

3. 폴란드의 반격

4. Ukrainian Galician Army (UHA)

5. 코만차 공화국


1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8

2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9

4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11



1. 지난 이야기 요약 


(1) 리비우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루마니아가 군대를 보내 부코비나 북부를 점유하던 우크라이나-부코비나 공화국을 정복합니다. 폴란드 군은 드로호비치라는 유전 지대를 공격해보지만 우크라이나 수비대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실패합니다.


(2) 볼히니아 지역에서 폴란드 군대와 우크라이나 군대가 만나 지역을 놓고 갈등합니다.


(3) 동갈리치아 전선은 서서히 교착되어 갑니다. 1919년 1월 22일, 서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연합을 하고, 2차 공세 때 리비우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으로 끝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3국 협상이 전쟁에 개입해 폴란드 쪽을 지지해줍니다.


(4) 한편, 서우크라이나 군대 소속의 소규모 부대가 트란스카르파티아를 공격하면서 체코 경찰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문제는 체코가 당시 우크라이나의 우방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일로 인해 화가 난 체코는 우크라이나의 정치적,외교적 고립에 한몫 합니다.


(5) 일시적인 휴전 동안 폴란드는 반격의 기회를 얻었고, 폴란드는 훨씬 더 강력한 부대를 끌어모아 우크라이나 군을 전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루마니아가 다시 한번 더 올라오면서 우크라이나는 양면 전선을 강요 받게 됩니다.




2. 서우크라이나의 초르트키프 공세


  초르트키프 공세는 서우크라이나 군의 반격을 말합니다. 공세의 1차 목적은 폴란드 군대를 졸로타리파 강 너머로 몰아내며 우크라이나 군이 사기를 올리는 것이며, 2차 목적은 더 큰 군대를 모아 폴란드 군을 서우크라이나 영토 내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 입니다.


  1919년 6월 8일, 러시아 군의 장군이었던 올렉산데르 그레코프가 이끄는 19,000명의 서우크라이나 군대(UHA)가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합니다. 우크라이나 군대는 공세 시작 이후 2주 동안 Hnyla Lypa 강과 스뜨리 강 상류 유역까지 진격하면서 5개의 폴란드 사단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더 구체적인 전투 전개를 이야기하자면, 6월 10일에 야즐로베츠, 6월 11일에 부차츠, 6월 14일에 피드가이치, 니즈니프, 테르노필, 6월 21일에 베레자니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폴란드 군은 자칫하면 포위될 뻔도 했으나, 폴란드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군의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은 6월 27일까지 120km를 진격합니다. 그 자리에서 리비우까지는 고작 이틀 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조금만 더 진격하면 리비우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보급 문제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공세 종말점을 맞이합니다. (우크라이나 병사 개인 당 총알이 5~10발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원래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드로호비치 유전에서 나오는 기름을 팔아 군대를 무장시킬 계획이었습니다. 문제는 정치적, 외교적 문제로 인해 무기와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경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하는 것 뿐이었고, 우크라이나가 체코슬로바키아로 통하는 길을 유지하는 데에 실패하면서 그레코프의 공세는 이대로 끝나버립니다.



3. 폴란드의 반격


  6월 27일, 폴란드 군 2개 사단을 지휘하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전장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6월 28일, 폴란드의 대규모 반격이 시작됩니다. 폴란드 군은 서우크라이나 군보다 더 좋은 장비를 가지고 있었으며, 수적으로도 매우 우세했습니다. 서우크라이나 군대는 7월 중순까지 즈브루비치 강으로 밀려납니다. 게다가 10만 명의 시민, 6만 명의 우크라이나 군인, 그리고 전투 준비를 마쳤던 2만 명의 우크라이나 군인이 즈브루비치 강을 지나 동우크라이나까지 필사적으로 탈출합니다. 사실상 서우크라이나 군대(UHA, Ukrainian Galician Army) 전체가 동우크라이나로 탈출했다고 보면 됩니다.




(전쟁 후반부 전역도)


4. Ukrainian Galician Army (UHA)


(1) 개요


   서우크라이나 군대라고 읽으시면 됩니다. 이들은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동안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국방을 책임졌던 군대 입니다.



(2) 장교 부족 문제


  수백년 동안의 폴란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걸 잘 보여주는 예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 내의 장교 구성입니다. 오-헝 제국 장교 1천명 중 고작 2명이 우크라이나 인이고, 37명 이상이 폴란드 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크라이나는 고급 장교 인력이 부족했던 것 입니다. 따라서 서우크라이나 건국 이후 창설된 UHA에는 '불균형적이고 낮은 장교 비율'이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러시아 군대에서 활동했던 고위 장교들에게 큰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하일로 오멜야노비치-파블렌코 장군 같은 사람들에게 말이죠. 또한 갈 길을 잃은 장교 출신의 오스트리아인과 독일인에게 장교직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UHA 소속의 장교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들과 가장 소통하기 쉬운 언어가 독일어가 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UHA에서 장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2.4%에 불과했습니다.



(3) 무장


  1919년 6월은 UHA가 가장 강력할 때였습니다. 규모는 성인 남자 약 7만 ~ 7.5만 명이었습니다. 소수의 기병대와 포병대 역시 존재했습니다. 포병대는 오스트리아 군이 사용하던 것을 가져와 사용했습니다. 또한 2~3대의 장갑 차량과 2~3대의 장갑 열차 역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공군 역시 존재했습니다. 페트로 프랑코가 조직한 UHA 공군은 40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4월까지 공중에서 폴란드보다 우세한 모습을 보입니다.



(Nieuport 17과 함께 사진을 찍은 UHA 소속 군인)


(4) 시츠 소총부대


  앞서 여러 차례 언급 되었던 시츠 소총부대 역시 UHA의 일원이었습니다. 이들은 UHA 내에서 최정예 부대로 활동했습니다. 인원은 약 8,600명 정도였습니다.



(5) 유대인 대대


  이들은 테르노필에서 유대인 고등학교, 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Solomon Leimberg 중위가 지휘했습니다. 1919년 6월에 조직 되었고, 당시 약 1,200명이 참여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7월에 폴란드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1919년 말에 발진티푸스라는 병이 돌면서 다수가 사망하고, 생존자들은 UHA에 재배치 됩니다.



(6) 편제


1군단

-제5 Sokal 여단

-제6 Rava 여단

-제9 Uhniv-Belz 여단

-제10 Yavoriv 여단


2군단

-시츠 소총부대

-제2 Kolomyia 여단

-제3 Berezhany 여단

-제4 Zolochiv 여단


3군단

-제1 산악 여단

-제7 Stryi 여단

-제8 Sambir 여단

-Krukevychi, Hlyboka 전투 부대 => 나중에 제11 Stryi 여단으로 재편됨

-제14 여단(나중에 편제됨)


4군단

-제12 여단

-제21 Zbarazh 여단



5. 코만차(Komancza) 공화국




(코만차 공화국 위치)



코만차 공화국, 또는 동램코(Eastern Lemko)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나라는 2편에서 소개했던 후출 공화국처럼 우크라이나계 국가입니다. 영토는 33개의 램코 마을, 동부 램코피나의 코만차 정도였습니다. 1918년 11월 4일에 형성되어, 1919년 1월 24일에 해체됩니다.


동시기에 생겨난 램코 공화국과는 다르게 이들은 애초부터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연합할 계획이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램코 공화국을 소개할 때 다시 언급하겠지만, 램코 공화국은 러시아 소비에트와 연합할 생각이었죠.) 하지만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이들의 연합 계획은 폴란드 정부에 의해 실패로 끝납니다. 이후 코만차 공화국은 폴란드 제2공화국 영토의 일부가 됩니다.





자료 출처

폴-우 전쟁 영문 위키

초르트키프 공세 영문 위키 

UHA 영문 위키

코만차 공화국 영문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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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문 위키를 요약한 번역글 입니다.



목차


1. 지난 이야기 요약

2.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3. 볼히니아에서의 갈등

4. 교착된 동갈리치아 전선

5. 양면 전선

6. 후출 공화국


1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8

3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10

4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11



1. 지난 이야기 요약


(1)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갈리치아 지방을 두고 수백년 전부터 서로의 역사가 얽히고 설켜 있었습니다. 그러던게 19세기 20세기 들어서 갈등이 심화됩니다.


(2) 1차대전 이후, 동갈리치아 지역이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손에 넘어가며, 그곳에 살던 폴란드 인들이 체포됩니다. 폴란드 인들은 여기에 민병대 같은 저항군을 조직하여 저항합니다.


(3) 공식적으로 독립된 폴란드가 바로 정규군을 이끌고 들어가 리비우에서 저항군을 포위하던 우크라이나 군대를 격파하고, 6개월 동안 돌출부를 수비합니다.




2.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리비우에서 서우크라이나 군과 저항군이 힘겹게 싸우고 있는 동안, 다른 곳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먼저 드로호비치라는 지역을 보겠습니다. (당시 드로호비치를 비롯한 삼비르, 야로스와프, 페레미실 등에서도 폴란드 인들이 저항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군대에 의해 진압 당합니다. ) 1918년 11월 9일, 폴란드 군대는 드로호비치 유전 지대를 기습 공격을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군대가 수적으로 더 우세했으며, 폴란드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후퇴합니다. 이후 우크라이나 군대는 1919년 5월까지 이 유전 지대를 사수합니다.


  1918년 11월 6일, 우크라이나 인들이 세운 새로운 정부가 부코비나 북부 절반을 본인 영토라고 주장합니다. 국명은 Ukrainian Bukovina 이며, 오멜리안 포포비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수도는 체르니우치로 정해집니다.



(체르니우치 : Chernivtsi)


  하지만 이전 편에 언급했다시피 부코비나 지역은 루마니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던 땅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이상한 정권이 들어서니 루마니아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918년 11월 11일, 루마니아 군대가 체르니우치로 진격해 들어가 도시를 점령합니다.



3. 볼히니아에서의 갈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직후 폴란드 군대는 헤움(Chelm) 지역으로 진출합니다. 볼히니아 서남부 지역에 주둔하던 오스트리아 군대의 사령관은 모든 권한을 해당 지역의 폴란드 위원회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1918년 11월에서 12월 동안 폴란드 군대는 더나아가 포들라히아와 서부 폴레시아 지방으로 진출합니다. 하지만 서부 볼히니아에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오체스키 장군의 군대에 의해 진군이 멈춥니다. (여기에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다른 국가입니다.)


  폴란드 군은 포기하지 않고,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셰멘 페틀류라 장군이 이끄는 우크라이나 군대는 헤움 지역을 점령하고 싶어했기에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ps. 여담으로 셰멘 페틀류라 장군은 폴란드-소련 전쟁 때 우크라이나 군 사령관으로써 폴란드 군과 함께 소련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포들리히아)



4. 교착된 동갈리치아 전선



  1918년 12월 동안 진행된 빠르고 효과적인 군대 동원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1919년 12월까지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고, 폴란드가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도록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리비우를 세 방면으로 장기간 포위할 수 있던 것도 군대 동원의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한 폴란드가 건설했던 프셰미실 쪽 철도의 양쪽에 있는 마을들을 우크라이나 군대가 완벽히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전편의 리비우 공방전 때 언급했듯이 우크라이나 군대는 1919년 5월까지 리비우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고, 기타 동갈리치아 지방 역시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이당시 이탈리아와 폴란드의 보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사기가 굉장히 높았다고 합니다. 반면 폴란드 왕국에서 온 폴란드 군인들, 즉 독립한 폴란드에서 온 폴란드 군대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군대가 쉽게 폴란드의 수비를 뚫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폴란드 군대를 이끄는 장교들이 잘 훈련 되었고, 군사적인 면에서 훌륭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또한 후방의 철도 등을 지키는 비상기동부대에 속한 군인들은 꽤나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폴란드 군대는 여러 전투에서 적은 사상자를 낸 반면, 우크라이나 군대는 그들보다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전선이 교착되어갑니다.



  폴란드 군대가 신속했음을 보여주는 전투가 있습니다. 


  1918년 12월 9일, 우크라이나 군대가 프셰미실 외각에 있는 폴란드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피셰미실을 점령하여 폴란드와 리비우로 가는 길의 허리를 자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신속히 군대를 보내 우크라이나 군대의 진격을 저지시켰고, 결국 12월 17일에 우크라이나 군대는 공격에 실패하고 물러납니다.


  우크라이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동우크라이나에서 갈리치아로 온 부대가 서우크라이나 인들과 합류하여 12월 27일에 리비우에 대한 첫번째 공세를 개시합니다. 전편에서 언급했다시피 공세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리비우 폴란드 수비대가 만든 장갑 차량)



  한편, 폴란드에서는 Jan Romer가 이끄는 신병 5천이 내려와 리비우에 있는 폴란드 군과 합류합니다. 그리고 폴란드 군은 1919년 1월 6일에서 11일까지 리비우 북부의 라바 루스카라는 지역 근처에 있는 서우크라이나 군대와 전투를 벌입니다. 이때 Romer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우크라이나 군대를 뚫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만, 폴란드 군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폴란드 군은 1월 11일 ~ 13일 동안 리비우를 포위한 우크라이나 군을 남쪽으로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가했고, 한 장군이 이끄는 우크라이나 군은 오히려 리비우를 공격합니다. 물론 둘 다 실패합니다.


  곧이어 1919년 1월 22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연합을 하게 됩니다. 이 날은 '우크라이나 연합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연합이 되기는 했어도 각자의 정부와 군대는 존재했습니다. 어찌되었든 둘이 연합을 함으로써 드디어 깔끔하게 폴란드-우크라이나 구도로 전쟁이 전개됩니다.


 1919년 2월, 폴란드 군은 심비르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도합니다. 우크라이나 수비대가 분전했고, 결국 폴란드 군은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납니다. 허나, 우크라이나 수비대는 이동 속도가 느리다보니 전과 확대를 시도하지는 못합니다.


  1919년 2월 14일, 우크라이나는 전에도 이야기 했던 리비우에 대한 2차 공세를 가합니다. 이때 우크라이나 군은 리비우-프셰미실 철도를 차단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전투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프랑스가 개입을 하게 됩니다. 2월 22일, 프랑스 주도 하에 삼국협상과 우크라이나 간의 우호 협약이 맺어졌고, 그 협약에는 우크라이나의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강력한 요구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결국 2월 25일, 우크라이나 군대는 리비우에 대한 공격을 연기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리비우와 유전 지대를 포함한 동갈리치아 70%를 폴란드에게 넘겨주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합니다. 대신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땅이 된  유전 지대에서 나오는 기름의 반을 공급 받게 되는 거죠. 폴란드는 당연히 여기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게 너무 유리하게 된 불공평한 제안이라며 반발합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3월 4일에 공격을 재개합니다.


  3월 5일, 우크라이나의 포병대가 포격을 개시했고, 폴란드 군은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나 여기에 가만히 있을 폴란드가 아니었습니다. 폴란드는 이미 8천에서 1만 가량의 지원 부대를 준비 중이었고, 이들이 3월 12일에 프셰미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는 3월 18일에 리비우-프셰미실을 점령했던 우크라이나 군대를 몰아냅니다. 우크라이나가 점하고 있던 이점이 사라진 것 입니다.


  한편, 1919년 1월 6일 ~ 11일까지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소속의 Ukrainian Galician Army 소속의 소규모 부대가 트란스카르파티아(Transcarpathia)를 침공합니다. 당시 트란스카르파티아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인들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게 원인인 듯 합니다. 어쨌든, 해당 지역으로 침공한 서우크라이나 군대는 헝가리 경찰, 체코슬로바키아 경찰들과 교전을 벌였고, 헝가리가 관리하던 몇몇 우크라이나 인 마을들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반면 체코슬로바키아 쪽을 공격한 우크라이나 군대는 그대로 철수합니다. 당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유일하게 교역을 하던 나라가 체코슬로바키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방을 공격한 당신은 도대체)



5. 양면 전선


  1919년 5월 14일, 폴란드는 볼히니아와 동갈리치아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합니다. 이때 폴란드 군에는 새로이 합류한 군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제프 할러 데 할렌부르크 장군이 이끄는 푸른 군대 입니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활약한 폴란드 군대입니다. 이들은 협상국의 장비를 갖추었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프랑스 장교진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인원은 6만명이 넘어갑니다. 하지만 Ukrainian Galician Army에게는 푸른 군대 같은게 없었죠. 폴란드는 푸른 군대가 보통 군대가 아닌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전선으로 보내 동갈리치아를 확보하고, 전쟁을 종식시키기로 합니다.



(푸른 군대 소속의 르노 전차 입니다. 무려 120대에 이르렀고, 단일 부대 규모 면에서는 세계 4위였습니다.

이들은 전부 리비우로 갔고, 우크라이나 군대는 120대의 르노 전차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에 삼국협상은 프랑스 장비를 들고 우크라이나 군대와 싸우지 말라고, 공세를 중단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인들이 볼셰비키들이라면서 깔끔히 무시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때에 루마니아 군대가 다시 한번 더 움직이면서 우크라이나는 양면 전선을 강요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군대는 스타니슬라비프를 포함한 동갈리치아 남부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나누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마저 루마이나 군에 의해 격퇴 당하면서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어버립니다.


  이윽고 우크라이나 군의 전선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우크라이나 군의 주력을 담당해오던 시츠 소총부대 만큼은 철수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우크라이나 군대를 몰아붙인 폴란드는 5월 27일, 즈워타 리파 - 베레자니 - 예지에르나 - 라지비우프 라인을 형성합니다. 이윽고 삼국협상은 폴란드에게 공격을 중지하기를 요구했고, 할러 장군은 이에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합니다.



6. 후출 공화국



 


(파란색 영역이 후출 공화국 영토 입니다.)


  1918년 12월 20일~22일까지 헝가리 군이 이 지역에 들어와 우크라이나 인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우크라이나 인의 의회를 해산시킵니다.


  1919년 2월 7일~8일 밤, 라키프 지역의 사람들이 헝가리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킵니다. 이때 약 500명의 헝가리 경찰들을 포로로 잡습니다. 후출 공화국의 의회장으로 발탁된 Stepan Klochurak 장군은 1,000여 명을 무장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이후, 2월 17일에 후출 군대와 시게투마르마치에이를 점령하고 있던 루마니아 군이 교전을 벌입니다. 후출 군대는 18~41명 전사, 39~150명 부상, 장교 20명을 포함한 400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크게 패배합니다.


  서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연합하고 그 다음 날인 1919년 2월 23일, Stepan은 후출 공화국의 대표로 연합 내에 있던 '노동 회의'에 참석합니다. 같은 우크라이나계 국가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죠.


  1919년 4월 말, 루마니아 군대가 트란스카르파티아를 점령하는 과정 속에서 후출 공화국의 중심부가 다시 헝가리 군에게 점령 되었고, 체코는 서쪽 지역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합니다. 결국에는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지역의 대부분이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고, 후출 공화국의 영토는 동쪽 끄트머리만 남게 됩니다.


  1919년 6월 11일, 헝가리 군이 남은 후출 공화국의 영토로 진격합니다. 약 1,100여 명으로 추산되는 후출 공화국의 군대는 헝가리 군에 대항하지만 결국 헝가리 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후 헝가리는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있다가 체코슬로바키아가 본인들의 땅임을 주장하자 1919년 9월에 공식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 편입 됩니다.


  이후 1939년에 우크라이나 인들이 카르파토-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독립을 외치지만, 헝가리 군 4만 명이 밀고 들어와 지역을 합병해버립니다. 현재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 영토에 속합니다.




자료 출처


폴-우 전쟁 영문위키

internet encyclopedia of ukraine

후출 공화국 영문위키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영문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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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문 위키를 요약한 번역글 입니다.



목차

1. 개요

2. 각 국의 영토

3. 참전국

4.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갈등 배경

5. 마찰의 가속화

6. 리비우 전투


2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9

3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10

4편 링크: https://2inro.tistory.com/11



1. 개요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진행된 폴란드와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사이의 전쟁을 말합니다.




2. 각 국의 영토



(1) 폴란드 1918



(이미지 출처)





(2)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3. 참전국


 폴란드 (19만 명)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7만~7.5만 명 혹은 10만 명)

 루마니아 왕국 (4천 명)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3.5만 명)

 헝가리 제1 공화국 (620 명 이상)

 Hutsul 공화국 (1,100 명)

 

 Komancza 공화국 (800 명)

 

 부코비나 지역의 우크라이나 인들 





4.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갈등 배경



  갈리치아 지방을 두고 벌어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어쩌면 수백년 전부터 예견되어 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갈리치아 지방에는 우크라이나 인들이 주를 이루었던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1199~1253)이 존재했던 바 있었습니다. 이후 동유럽 강자로 떠오른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인들이 농노로 전락합니다. 이들은 폴란드의 탄압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을 해왔습니다. 물론 그 당시 폴란드 인들이 주로 영주 같은 사회 고위 계급에 위치해 있었고, 우크라이나 인들의 저항은 '폴란드 인'자체에 대한 저항이라기 보다는 '폴란드 인으로 구성된 사회 고위 계급'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고 전유럽에 민족주의 열풍이 돌면서 그들이 저항할 대상은 '폴란드 인'이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양측의 이러한 대립은 점점 심해져갑니다.


  폴란드 역시 갈리치아 지방에 대한 역사가 깊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폴란드는 세력을 확장해나가면서 갈리치아 지방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그리고 1772년 1차 폴란드 분할 당시, 오스트리아가 갈리치아 지방을 합병합니다. 해당 지역에는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많은 폴란드 인이 살고 있던 크라크푸라는 도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우크라이나 인들은 갈리치아를 '서갈리치아는 폴란드가, 동갈리치아는 우크라이나가 점유'하는 식으로 나누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폴란드 인들은 우크라이나 인들의 이러한 행보를 상당히 경계했습니다.


  역사 문제 뿐만 아니라 인구 구성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동갈리치아 지방에 사는 우크라이나 인은 당시 65%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폴란드 인은 22%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도시의 주요 구성원이 폴란드 인이었습니다. 그 예로 리비우를 들겠습니다.

  동갈리치아가 오스트리아 영토였을 당시, 해당 지역에서 가장 크고, 수도격인 도시는 리비우(Lviv)였습니다. 1910년 대에 조사한 바에 빠르면, 도시 인구 중 무려 60%가 폴란드 인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인은 고작 17%에 불과했습니다. 도시에 사는 폴란드 인들은 리비우가 폴란드의 문화적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즉슨 리비우가 폴란드 영토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이들의 갈등에 불을 붙이는 데에 일조합니다. 오-헝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1916년 10월, 우크라이나 인들에게 전쟁이 끝나고 갈리치아 지방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누겠다고 약속합니다.



(갈리치아 지방 지도)



5. 마찰의 가속화



  1918년 10월, 우크라이나 인으로 구성된 2개 연대가 리비우(Lviv)에 배치됩니다. 그리고 1918년 10월 1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오스트리아 의회에 속해있던 우크라이나 인들과 갈리치아 지역민, 부코비나 지역민으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민족 의회'가 형성 됩니다. 이윽고 의회는 서우크라이나 인들의 단일 국가 건국을 알립니다. 동시에 리비우를 제외한 서우크라이나 영토 내의 폴란드 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WUPR은 단일 국가를 선포하면서 본인들의 영토를 규정했습니다. 서쪽에 있는 노비송치 도시를 포함한 동부 갈리치아, 볼히니아,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부코비나가 WUPR의 영토로 선언되었습니다. (당시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와 부코비나는 헝가리와 루마니아도 자기 땅이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제사회에서 정식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WUPR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니 어이가 없었을 것 입니다.)


  한편, 리비우가 점령되자 폴란드 인들 사이에서는 리비우와 동갈리치아 지방을 되찾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드미트로 비또브스키(Дмитро Вітовський) 대령은 리비우 주둔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그는 시츠 소총부대 소속의 젊은 장교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도시를 장악합니다. 그리고 그 날, 11월 1일에 리비우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WUPR)의 첫 수도가 됩니다.



6. 리비우 전투



  리비우 전투는 1918년 11월 1일에서 1919년 5월까지, 무려 6개월간 지속된 전투입니다. 초기에는 폴란드 민병대와 서우크라이나 군대가 맞붙었으나, 나중에는 폴란드 정규병이 가담하면서 전투가 커져버립니다.


  리비우 전투가 일어난 원인은 앞서 5번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리비우 지역이 우크라이나에 의해 장악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폴란드 인들은 여기에 대해 저항을 합니다.


  최초의 저항은 규모가 작았습니다. 폴란드인 지휘관인 Zdzisław Tatar-Trześniowski 아래에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도시 서부 외각의 학교를 중심으로 저항을 진행합니다. 해당 저항군에는 PMO(Polish Military Organisation) 소속의 베테랑 병사들도 참여한 상태였습니다. 초기에 있던 우크라이나와의 충돌 이후, 폴란드 스카우트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자원자가 몰렸고, 덕분에 첫 전투날 기록된 폴란드 측 인원이 1천 이상이 됩니다. 이들은 도시 서부의 몇몇 지역들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도시 중심부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군세가 철통 같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폴란드 인이 맞서는 비또브스키가 이끄는 군대는 수적으로 질적으로 우세했고, 실전 경험 역시 충분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시가전 경험이 부족했고, 군대 내에 마을 주민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능력을 100% 발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더나아가 부코비나에서 출발해 리비우로 진격하려던 정예 시츠 소총부대가 리비우 외각에 있는 클레파리프라는 지역에서 폴란드인들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혀 진격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반면 폴란드 인들은 우크라이나 군대에 비해 수와 질, 실전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도시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방어에 있어서 열정적이었습니다. 다음 날 전투에서는 폴란드 측 방어 병력만 6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중에는 여자들, 학생들, 어린이들도 꽤 있었습니다. 심지어 경범죄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전쟁에 뛰어들게 된 계기에는 그들의 영웅주의적인 심리의 영향이 컸습니다.


  11월 3일, 마침내 시츠 소총부대 소속의 몇몇 부대가 폴란드 인의 저항을 뚫고 도시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군대의 지휘권은 Hnat Stefaniv에게로 양도 됩니다. 한편, 폴란드 인들은 리비우 중앙 역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고,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의 수송 열차 2대를 탈취합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우위를 유지해주던 군수품이 끊겨버립니다.


  11월 5일, 우크라이나 군대가 도시 서부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개시합니다. 하지만 중앙부에 있는 폴란드 군은 우크라이나 군의 공격을 빈번히 격퇴시켰고, 도시 중앙에서는 결국 양측 모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11월 11일, 마침내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바츠와프 스타히에비츠는 폴란드 정규군 이끌고 리비우에서 고작 70km 떨어진 프셰미실로 진격하여 그곳에 주둔하던 우크라이나 군대를 격파합니다.

  리비우에서 상황을 보고 받은 Stefaniv는 폴란드 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리비우 내의 폴란드 저항군들에 대한 우크라이나 군대의 포위망을 뚫어 그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폴란드 저항군이 장악 중인 도시 서부에 대한 총공세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11월 13일 ~ 15일 동안 이루어진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일단 방어에 성공합니다. 결국 11월 18일에 양측이 휴전 협정을 체결합니다.


  리비우 내에서 저항군과 우크라이나 군 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2주 뒤, 미하우 카라셰비츠-토카셰프스키 대령 휘하의 140명의 장교, 1228명의 병사, 8문의 대포가 프셰미실에 있는 폴란드 군과 합류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Stefaniv가 예상한대로 우크라이나 군의 포위망을 뚫고 리비우를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마침내 11월 21일, 폴란드 군은 이를 행동에 옮겼습니다. 우크라이나 군대의 포위망은 결국 뚫려버립니다. 우크라이나 군은 폴란드 군에게 리비우 내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을 내주게 되었고, 이후 도시를 세 방면으로 포위한 폴란드 군은 우크라이나 군을 완전히 격파합니다.


  폴란드가 리비우를 점령하고 난 뒤, 르부프 포그롬이라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우크라이나 인과 유대인 약 340여명이 폴란드 군에 의해 학살 당한 사건입니다. 이후에도 폴란드 군은 도시 내에서 일어난 여러 저항들을 강경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 리비우 전투는 이대로 끝이 났을까요?


  앞서 리비우 전투를 소개하면서 6개월 동안 지속 되었다고 언급했습니다. 폴란드는 그토록 원하던 리비우를 가지기는 했으나 동시에 긴 돌출부를 형성하게 됩니다. 폴란드는 이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리비우에서 폴란드 중심부까지 향하는 철도를 놓고 장갑 열차를 적극 운용합니다.

   우크라이나 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12월 22일, 우크라이나 군이 도시에 대한 포격을 진행했고, 12월 27일에는 첫번째 공세를 실행합니다. 하지만 1919년 2월까지 폴란드 군이 무너지지 않고, 외교적인 문제로 인해 공격은 중단 됩니다. 이후 잠시동안 휴전 협정이 체결 되었다가 3월 1일에 우크라이나 군은 다시 한번 더 공세를 가합니다. 하지만 서로 소규모 접전만 치루다가 1919년 4월, 폴란드 군이 동갈리치아 전선에 대한 총공세를 진행하면서 우크라이나 군의 공세는 끝나버립니다. 전면 포위될 위기에 놓여진 우크라이나 군은 결국 군을 물려야만 했고, 이로써 6개월 동안의 리비우 공방전은 폴란드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지도의 남쪽을 보면 폴란드의 돌출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출처)



여담 - 우크라이나 지휘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휘권이 양도 되기 전의 우크라이나 군을 맡고 있던 비또브스키는 1919년에 독일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합니다.

Stefaniv는 1949년 독일에서 사망합니다.




자료 출처

렘베르크 전투 영문위키

폴-우 전쟁 영문위키

internet encyclopedia of uk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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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새벽 1시에 대한민국과 키르스스탄과의 C조 경기가 진행 되었습니다.



(출처: 네이버 스포츠)




많은 축구 팬들은 필리핀 전에서 보여주었던 문제점을 보완하여 더 나은 경기가 진행될 거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전반전




하지만, 모두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반전은 필리핀 전에서 보여주었던 안 좋은 모습들을 보여주었는데요.




불필요한 패스 미스, 아쉬운 슈팅 등 불안불안한 경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런 경기가 진행될수록 키르기스스탄의 자신감은 점점 커졌겠죠.




그러던 전반 41분에 대한민국이 코너킥 찬스를 얻었고, 김민재 선수가 멋진 해딩 골로 선제골을 넣었습니다.


김민재 선수의 A매치 첫 데뷔골이었죠.


(출처: NewsBeezer)





후반전



선제골을 먹힌 키르기스스탄의 공격이나 골 패스 능력, 수비 등 여기저기에서 허점이 드러납니다.



이와 동시에 기세가 산 한국 선수들은 전반전보다 공격적인 플레이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기대와는 다르게 후반전 내내 단 하나의 추가골도 넣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공격까지는 좋았으나 골 결정력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죠.



키르기스스탄 역시 이 경기에서 패배할 시에 16강 진출이 어려워지고, 고작 한 골 차이였기 때문에 전반보다는 부족하지만 계속 공격적인 페이스를 유지하며 위협적인 장면을 몇번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출처: Fox Sports Aisa)



다음 상대는 중국입니다. 사실상 C조의 1,2위를 가르는 중요한 경기입니다.



앞서 중국은 맞불 작전을 놓은 필리핀을 상대로 3:0이라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현재 많은 축구 팬들은 중국은 결코 쉬운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비록 16강 진출이 확정되어 있지만, 조 1위로 올라갔을 때와 조 2위로 올라갔을 때는 크게 다릅니다.



C조 마지막 경기를 잘 준비하여 좋은 모습 보여주기를 기대해봅니다.

(출처: 네이버 스포츠)





다가오는 1월 12일 새벽 1시에 아시안컵 C조 경기가 진행됩니다. 바로...





대한민국 VS 키르기스스탄





앞서 대한민국은 필리핀을 상대로 1:0이라는 조금은 아쉬운 스코어를 기록하며 승리했고




키르기스스탄은 중국을 상대로 1:2로 패배했습니다.


(출처: 아주뉴스)





키르기스스탄은 이번이 아시안컵 첫 출전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상대로 공격적으로 나갔고, 유효 슈팅을 수차례 때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전반전이 1:0으로 끝나면서 중국이 한차례 위기를 겪기도 했었죠.




(출처: 마이데일리)




최근 키르기스스탄의 크레스티닌 감독은 한국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번 경기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앞서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조금은 아쉬운 장면들을 보이며 축구팬들이 실망스러운 경기였다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승리했고, 아시안컵에서의 두번째 경기인 만큼, 첫번째 경기보다 텐션이 좋아졌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시 한번 더 한국의 승리를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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