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문 위키를 요약한 번역글 입니다.



목차


1. 지난 이야기 요약

2.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3. 볼히니아에서의 갈등

4. 교착된 동갈리치아 전선

5. 양면 전선

6. 후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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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이야기 요약


(1)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갈리치아 지방을 두고 수백년 전부터 서로의 역사가 얽히고 설켜 있었습니다. 그러던게 19세기 20세기 들어서 갈등이 심화됩니다.


(2) 1차대전 이후, 동갈리치아 지역이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손에 넘어가며, 그곳에 살던 폴란드 인들이 체포됩니다. 폴란드 인들은 여기에 민병대 같은 저항군을 조직하여 저항합니다.


(3) 공식적으로 독립된 폴란드가 바로 정규군을 이끌고 들어가 리비우에서 저항군을 포위하던 우크라이나 군대를 격파하고, 6개월 동안 돌출부를 수비합니다.




2.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리비우에서 서우크라이나 군과 저항군이 힘겹게 싸우고 있는 동안, 다른 곳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먼저 드로호비치라는 지역을 보겠습니다. (당시 드로호비치를 비롯한 삼비르, 야로스와프, 페레미실 등에서도 폴란드 인들이 저항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군대에 의해 진압 당합니다. ) 1918년 11월 9일, 폴란드 군대는 드로호비치 유전 지대를 기습 공격을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군대가 수적으로 더 우세했으며, 폴란드 군대는 어쩔 수 없이 후퇴합니다. 이후 우크라이나 군대는 1919년 5월까지 이 유전 지대를 사수합니다.


  1918년 11월 6일, 우크라이나 인들이 세운 새로운 정부가 부코비나 북부 절반을 본인 영토라고 주장합니다. 국명은 Ukrainian Bukovina 이며, 오멜리안 포포비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수도는 체르니우치로 정해집니다.



(체르니우치 : Chernivtsi)


  하지만 이전 편에 언급했다시피 부코비나 지역은 루마니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던 땅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이상한 정권이 들어서니 루마니아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918년 11월 11일, 루마니아 군대가 체르니우치로 진격해 들어가 도시를 점령합니다.



3. 볼히니아에서의 갈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직후 폴란드 군대는 헤움(Chelm) 지역으로 진출합니다. 볼히니아 서남부 지역에 주둔하던 오스트리아 군대의 사령관은 모든 권한을 해당 지역의 폴란드 위원회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1918년 11월에서 12월 동안 폴란드 군대는 더나아가 포들라히아와 서부 폴레시아 지방으로 진출합니다. 하지만 서부 볼히니아에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오체스키 장군의 군대에 의해 진군이 멈춥니다. (여기에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다른 국가입니다.)


  폴란드 군은 포기하지 않고,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셰멘 페틀류라 장군이 이끄는 우크라이나 군대는 헤움 지역을 점령하고 싶어했기에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ps. 여담으로 셰멘 페틀류라 장군은 폴란드-소련 전쟁 때 우크라이나 군 사령관으로써 폴란드 군과 함께 소련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포들리히아)



4. 교착된 동갈리치아 전선



  1918년 12월 동안 진행된 빠르고 효과적인 군대 동원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1919년 12월까지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고, 폴란드가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도록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리비우를 세 방면으로 장기간 포위할 수 있던 것도 군대 동원의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한 폴란드가 건설했던 프셰미실 쪽 철도의 양쪽에 있는 마을들을 우크라이나 군대가 완벽히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전편의 리비우 공방전 때 언급했듯이 우크라이나 군대는 1919년 5월까지 리비우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고, 기타 동갈리치아 지방 역시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이당시 이탈리아와 폴란드의 보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사기가 굉장히 높았다고 합니다. 반면 폴란드 왕국에서 온 폴란드 군인들, 즉 독립한 폴란드에서 온 폴란드 군대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군대가 쉽게 폴란드의 수비를 뚫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폴란드 군대를 이끄는 장교들이 잘 훈련 되었고, 군사적인 면에서 훌륭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또한 후방의 철도 등을 지키는 비상기동부대에 속한 군인들은 꽤나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폴란드 군대는 여러 전투에서 적은 사상자를 낸 반면, 우크라이나 군대는 그들보다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전선이 교착되어갑니다.



  폴란드 군대가 신속했음을 보여주는 전투가 있습니다. 


  1918년 12월 9일, 우크라이나 군대가 프셰미실 외각에 있는 폴란드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피셰미실을 점령하여 폴란드와 리비우로 가는 길의 허리를 자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신속히 군대를 보내 우크라이나 군대의 진격을 저지시켰고, 결국 12월 17일에 우크라이나 군대는 공격에 실패하고 물러납니다.


  우크라이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동우크라이나에서 갈리치아로 온 부대가 서우크라이나 인들과 합류하여 12월 27일에 리비우에 대한 첫번째 공세를 개시합니다. 전편에서 언급했다시피 공세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리비우 폴란드 수비대가 만든 장갑 차량)



  한편, 폴란드에서는 Jan Romer가 이끄는 신병 5천이 내려와 리비우에 있는 폴란드 군과 합류합니다. 그리고 폴란드 군은 1919년 1월 6일에서 11일까지 리비우 북부의 라바 루스카라는 지역 근처에 있는 서우크라이나 군대와 전투를 벌입니다. 이때 Romer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우크라이나 군대를 뚫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만, 폴란드 군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폴란드 군은 1월 11일 ~ 13일 동안 리비우를 포위한 우크라이나 군을 남쪽으로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가했고, 한 장군이 이끄는 우크라이나 군은 오히려 리비우를 공격합니다. 물론 둘 다 실패합니다.


  곧이어 1919년 1월 22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연합을 하게 됩니다. 이 날은 '우크라이나 연합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연합이 되기는 했어도 각자의 정부와 군대는 존재했습니다. 어찌되었든 둘이 연합을 함으로써 드디어 깔끔하게 폴란드-우크라이나 구도로 전쟁이 전개됩니다.


 1919년 2월, 폴란드 군은 심비르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도합니다. 우크라이나 수비대가 분전했고, 결국 폴란드 군은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납니다. 허나, 우크라이나 수비대는 이동 속도가 느리다보니 전과 확대를 시도하지는 못합니다.


  1919년 2월 14일, 우크라이나는 전에도 이야기 했던 리비우에 대한 2차 공세를 가합니다. 이때 우크라이나 군은 리비우-프셰미실 철도를 차단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전투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프랑스가 개입을 하게 됩니다. 2월 22일, 프랑스 주도 하에 삼국협상과 우크라이나 간의 우호 협약이 맺어졌고, 그 협약에는 우크라이나의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강력한 요구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결국 2월 25일, 우크라이나 군대는 리비우에 대한 공격을 연기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리비우와 유전 지대를 포함한 동갈리치아 70%를 폴란드에게 넘겨주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합니다. 대신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땅이 된  유전 지대에서 나오는 기름의 반을 공급 받게 되는 거죠. 폴란드는 당연히 여기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게 너무 유리하게 된 불공평한 제안이라며 반발합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3월 4일에 공격을 재개합니다.


  3월 5일, 우크라이나의 포병대가 포격을 개시했고, 폴란드 군은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나 여기에 가만히 있을 폴란드가 아니었습니다. 폴란드는 이미 8천에서 1만 가량의 지원 부대를 준비 중이었고, 이들이 3월 12일에 프셰미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는 3월 18일에 리비우-프셰미실을 점령했던 우크라이나 군대를 몰아냅니다. 우크라이나가 점하고 있던 이점이 사라진 것 입니다.


  한편, 1919년 1월 6일 ~ 11일까지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소속의 Ukrainian Galician Army 소속의 소규모 부대가 트란스카르파티아(Transcarpathia)를 침공합니다. 당시 트란스카르파티아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인들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게 원인인 듯 합니다. 어쨌든, 해당 지역으로 침공한 서우크라이나 군대는 헝가리 경찰, 체코슬로바키아 경찰들과 교전을 벌였고, 헝가리가 관리하던 몇몇 우크라이나 인 마을들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반면 체코슬로바키아 쪽을 공격한 우크라이나 군대는 그대로 철수합니다. 당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유일하게 교역을 하던 나라가 체코슬로바키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방을 공격한 당신은 도대체)



5. 양면 전선


  1919년 5월 14일, 폴란드는 볼히니아와 동갈리치아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합니다. 이때 폴란드 군에는 새로이 합류한 군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제프 할러 데 할렌부르크 장군이 이끄는 푸른 군대 입니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활약한 폴란드 군대입니다. 이들은 협상국의 장비를 갖추었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프랑스 장교진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인원은 6만명이 넘어갑니다. 하지만 Ukrainian Galician Army에게는 푸른 군대 같은게 없었죠. 폴란드는 푸른 군대가 보통 군대가 아닌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전선으로 보내 동갈리치아를 확보하고, 전쟁을 종식시키기로 합니다.



(푸른 군대 소속의 르노 전차 입니다. 무려 120대에 이르렀고, 단일 부대 규모 면에서는 세계 4위였습니다.

이들은 전부 리비우로 갔고, 우크라이나 군대는 120대의 르노 전차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에 삼국협상은 프랑스 장비를 들고 우크라이나 군대와 싸우지 말라고, 공세를 중단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인들이 볼셰비키들이라면서 깔끔히 무시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때에 루마니아 군대가 다시 한번 더 움직이면서 우크라이나는 양면 전선을 강요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군대는 스타니슬라비프를 포함한 동갈리치아 남부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나누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마저 루마이나 군에 의해 격퇴 당하면서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어버립니다.


  이윽고 우크라이나 군의 전선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우크라이나 군의 주력을 담당해오던 시츠 소총부대 만큼은 철수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우크라이나 군대를 몰아붙인 폴란드는 5월 27일, 즈워타 리파 - 베레자니 - 예지에르나 - 라지비우프 라인을 형성합니다. 이윽고 삼국협상은 폴란드에게 공격을 중지하기를 요구했고, 할러 장군은 이에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합니다.



6. 후출 공화국



 


(파란색 영역이 후출 공화국 영토 입니다.)


  1918년 12월 20일~22일까지 헝가리 군이 이 지역에 들어와 우크라이나 인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우크라이나 인의 의회를 해산시킵니다.


  1919년 2월 7일~8일 밤, 라키프 지역의 사람들이 헝가리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킵니다. 이때 약 500명의 헝가리 경찰들을 포로로 잡습니다. 후출 공화국의 의회장으로 발탁된 Stepan Klochurak 장군은 1,000여 명을 무장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이후, 2월 17일에 후출 군대와 시게투마르마치에이를 점령하고 있던 루마니아 군이 교전을 벌입니다. 후출 군대는 18~41명 전사, 39~150명 부상, 장교 20명을 포함한 400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크게 패배합니다.


  서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연합하고 그 다음 날인 1919년 2월 23일, Stepan은 후출 공화국의 대표로 연합 내에 있던 '노동 회의'에 참석합니다. 같은 우크라이나계 국가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죠.


  1919년 4월 말, 루마니아 군대가 트란스카르파티아를 점령하는 과정 속에서 후출 공화국의 중심부가 다시 헝가리 군에게 점령 되었고, 체코는 서쪽 지역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합니다. 결국에는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지역의 대부분이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고, 후출 공화국의 영토는 동쪽 끄트머리만 남게 됩니다.


  1919년 6월 11일, 헝가리 군이 남은 후출 공화국의 영토로 진격합니다. 약 1,100여 명으로 추산되는 후출 공화국의 군대는 헝가리 군에 대항하지만 결국 헝가리 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후 헝가리는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있다가 체코슬로바키아가 본인들의 땅임을 주장하자 1919년 9월에 공식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 편입 됩니다.


  이후 1939년에 우크라이나 인들이 카르파토-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독립을 외치지만, 헝가리 군 4만 명이 밀고 들어와 지역을 합병해버립니다. 현재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 영토에 속합니다.




자료 출처


폴-우 전쟁 영문위키

internet encyclopedia of ukraine

후출 공화국 영문위키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영문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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