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문 위키를 요약한 번역글 입니다.



목차

1. 개요

2. 각 국의 영토

3. 참전국

4.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갈등 배경

5. 마찰의 가속화

6. 리비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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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진행된 폴란드와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사이의 전쟁을 말합니다.




2. 각 국의 영토



(1) 폴란드 1918



(이미지 출처)





(2)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3. 참전국


 폴란드 (19만 명)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7만~7.5만 명 혹은 10만 명)

 루마니아 왕국 (4천 명)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3.5만 명)

 헝가리 제1 공화국 (620 명 이상)

 Hutsul 공화국 (1,100 명)

 

 Komancza 공화국 (800 명)

 

 부코비나 지역의 우크라이나 인들 





4.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갈등 배경



  갈리치아 지방을 두고 벌어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어쩌면 수백년 전부터 예견되어 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갈리치아 지방에는 우크라이나 인들이 주를 이루었던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1199~1253)이 존재했던 바 있었습니다. 이후 동유럽 강자로 떠오른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인들이 농노로 전락합니다. 이들은 폴란드의 탄압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을 해왔습니다. 물론 그 당시 폴란드 인들이 주로 영주 같은 사회 고위 계급에 위치해 있었고, 우크라이나 인들의 저항은 '폴란드 인'자체에 대한 저항이라기 보다는 '폴란드 인으로 구성된 사회 고위 계급'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고 전유럽에 민족주의 열풍이 돌면서 그들이 저항할 대상은 '폴란드 인'이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양측의 이러한 대립은 점점 심해져갑니다.


  폴란드 역시 갈리치아 지방에 대한 역사가 깊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폴란드는 세력을 확장해나가면서 갈리치아 지방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그리고 1772년 1차 폴란드 분할 당시, 오스트리아가 갈리치아 지방을 합병합니다. 해당 지역에는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많은 폴란드 인이 살고 있던 크라크푸라는 도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우크라이나 인들은 갈리치아를 '서갈리치아는 폴란드가, 동갈리치아는 우크라이나가 점유'하는 식으로 나누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폴란드 인들은 우크라이나 인들의 이러한 행보를 상당히 경계했습니다.


  역사 문제 뿐만 아니라 인구 구성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동갈리치아 지방에 사는 우크라이나 인은 당시 65%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폴란드 인은 22%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도시의 주요 구성원이 폴란드 인이었습니다. 그 예로 리비우를 들겠습니다.

  동갈리치아가 오스트리아 영토였을 당시, 해당 지역에서 가장 크고, 수도격인 도시는 리비우(Lviv)였습니다. 1910년 대에 조사한 바에 빠르면, 도시 인구 중 무려 60%가 폴란드 인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인은 고작 17%에 불과했습니다. 도시에 사는 폴란드 인들은 리비우가 폴란드의 문화적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즉슨 리비우가 폴란드 영토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이들의 갈등에 불을 붙이는 데에 일조합니다. 오-헝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1916년 10월, 우크라이나 인들에게 전쟁이 끝나고 갈리치아 지방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누겠다고 약속합니다.



(갈리치아 지방 지도)



5. 마찰의 가속화



  1918년 10월, 우크라이나 인으로 구성된 2개 연대가 리비우(Lviv)에 배치됩니다. 그리고 1918년 10월 1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오스트리아 의회에 속해있던 우크라이나 인들과 갈리치아 지역민, 부코비나 지역민으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민족 의회'가 형성 됩니다. 이윽고 의회는 서우크라이나 인들의 단일 국가 건국을 알립니다. 동시에 리비우를 제외한 서우크라이나 영토 내의 폴란드 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WUPR은 단일 국가를 선포하면서 본인들의 영토를 규정했습니다. 서쪽에 있는 노비송치 도시를 포함한 동부 갈리치아, 볼히니아,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부코비나가 WUPR의 영토로 선언되었습니다. (당시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와 부코비나는 헝가리와 루마니아도 자기 땅이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제사회에서 정식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WUPR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니 어이가 없었을 것 입니다.)


  한편, 리비우가 점령되자 폴란드 인들 사이에서는 리비우와 동갈리치아 지방을 되찾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드미트로 비또브스키(Дмитро Вітовський) 대령은 리비우 주둔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그는 시츠 소총부대 소속의 젊은 장교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도시를 장악합니다. 그리고 그 날, 11월 1일에 리비우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WUPR)의 첫 수도가 됩니다.



6. 리비우 전투



  리비우 전투는 1918년 11월 1일에서 1919년 5월까지, 무려 6개월간 지속된 전투입니다. 초기에는 폴란드 민병대와 서우크라이나 군대가 맞붙었으나, 나중에는 폴란드 정규병이 가담하면서 전투가 커져버립니다.


  리비우 전투가 일어난 원인은 앞서 5번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리비우 지역이 우크라이나에 의해 장악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폴란드 인들은 여기에 대해 저항을 합니다.


  최초의 저항은 규모가 작았습니다. 폴란드인 지휘관인 Zdzisław Tatar-Trześniowski 아래에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도시 서부 외각의 학교를 중심으로 저항을 진행합니다. 해당 저항군에는 PMO(Polish Military Organisation) 소속의 베테랑 병사들도 참여한 상태였습니다. 초기에 있던 우크라이나와의 충돌 이후, 폴란드 스카우트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자원자가 몰렸고, 덕분에 첫 전투날 기록된 폴란드 측 인원이 1천 이상이 됩니다. 이들은 도시 서부의 몇몇 지역들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도시 중심부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군세가 철통 같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폴란드 인이 맞서는 비또브스키가 이끄는 군대는 수적으로 질적으로 우세했고, 실전 경험 역시 충분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시가전 경험이 부족했고, 군대 내에 마을 주민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능력을 100% 발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더나아가 부코비나에서 출발해 리비우로 진격하려던 정예 시츠 소총부대가 리비우 외각에 있는 클레파리프라는 지역에서 폴란드인들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혀 진격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반면 폴란드 인들은 우크라이나 군대에 비해 수와 질, 실전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도시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방어에 있어서 열정적이었습니다. 다음 날 전투에서는 폴란드 측 방어 병력만 6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중에는 여자들, 학생들, 어린이들도 꽤 있었습니다. 심지어 경범죄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전쟁에 뛰어들게 된 계기에는 그들의 영웅주의적인 심리의 영향이 컸습니다.


  11월 3일, 마침내 시츠 소총부대 소속의 몇몇 부대가 폴란드 인의 저항을 뚫고 도시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군대의 지휘권은 Hnat Stefaniv에게로 양도 됩니다. 한편, 폴란드 인들은 리비우 중앙 역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고,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의 수송 열차 2대를 탈취합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우위를 유지해주던 군수품이 끊겨버립니다.


  11월 5일, 우크라이나 군대가 도시 서부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개시합니다. 하지만 중앙부에 있는 폴란드 군은 우크라이나 군의 공격을 빈번히 격퇴시켰고, 도시 중앙에서는 결국 양측 모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11월 11일, 마침내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바츠와프 스타히에비츠는 폴란드 정규군 이끌고 리비우에서 고작 70km 떨어진 프셰미실로 진격하여 그곳에 주둔하던 우크라이나 군대를 격파합니다.

  리비우에서 상황을 보고 받은 Stefaniv는 폴란드 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리비우 내의 폴란드 저항군들에 대한 우크라이나 군대의 포위망을 뚫어 그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폴란드 저항군이 장악 중인 도시 서부에 대한 총공세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11월 13일 ~ 15일 동안 이루어진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일단 방어에 성공합니다. 결국 11월 18일에 양측이 휴전 협정을 체결합니다.


  리비우 내에서 저항군과 우크라이나 군 간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2주 뒤, 미하우 카라셰비츠-토카셰프스키 대령 휘하의 140명의 장교, 1228명의 병사, 8문의 대포가 프셰미실에 있는 폴란드 군과 합류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Stefaniv가 예상한대로 우크라이나 군의 포위망을 뚫고 리비우를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마침내 11월 21일, 폴란드 군은 이를 행동에 옮겼습니다. 우크라이나 군대의 포위망은 결국 뚫려버립니다. 우크라이나 군은 폴란드 군에게 리비우 내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을 내주게 되었고, 이후 도시를 세 방면으로 포위한 폴란드 군은 우크라이나 군을 완전히 격파합니다.


  폴란드가 리비우를 점령하고 난 뒤, 르부프 포그롬이라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우크라이나 인과 유대인 약 340여명이 폴란드 군에 의해 학살 당한 사건입니다. 이후에도 폴란드 군은 도시 내에서 일어난 여러 저항들을 강경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 리비우 전투는 이대로 끝이 났을까요?


  앞서 리비우 전투를 소개하면서 6개월 동안 지속 되었다고 언급했습니다. 폴란드는 그토록 원하던 리비우를 가지기는 했으나 동시에 긴 돌출부를 형성하게 됩니다. 폴란드는 이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리비우에서 폴란드 중심부까지 향하는 철도를 놓고 장갑 열차를 적극 운용합니다.

   우크라이나 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12월 22일, 우크라이나 군이 도시에 대한 포격을 진행했고, 12월 27일에는 첫번째 공세를 실행합니다. 하지만 1919년 2월까지 폴란드 군이 무너지지 않고, 외교적인 문제로 인해 공격은 중단 됩니다. 이후 잠시동안 휴전 협정이 체결 되었다가 3월 1일에 우크라이나 군은 다시 한번 더 공세를 가합니다. 하지만 서로 소규모 접전만 치루다가 1919년 4월, 폴란드 군이 동갈리치아 전선에 대한 총공세를 진행하면서 우크라이나 군의 공세는 끝나버립니다. 전면 포위될 위기에 놓여진 우크라이나 군은 결국 군을 물려야만 했고, 이로써 6개월 동안의 리비우 공방전은 폴란드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지도의 남쪽을 보면 폴란드의 돌출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출처)



여담 - 우크라이나 지휘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휘권이 양도 되기 전의 우크라이나 군을 맡고 있던 비또브스키는 1919년에 독일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합니다.

Stefaniv는 1949년 독일에서 사망합니다.




자료 출처

렘베르크 전투 영문위키

폴-우 전쟁 영문위키

internet encyclopedia of uk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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